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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화재감식 담당 서문수철 경사

나무에게-- 2013. 8. 27. 11:59

6년차 형사생활 중 우연히 방향 바꿔… 과학수사대로 발탁된 뒤 천직 느껴
경기도내 사건 절반 도맡아 처리해
현장 나가면 냄새 맡으며 오감 동원
화재로 인한 억울함 없게 최선 다해

2009년 1월 일본 오사카의 한 식당. 불혹을 넘긴 한 사내의 흐느낌이 듣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손으로 막아도 새나오는 울음소리에 함께 있던 서문수철(44) 경사도 숙연해졌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재일 교포로 살면서 수없는 설움을 당했다. 풀 길이 없는 한을 조국의 경찰이 풀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서문 경사는 환한 표정으로 그 사내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서문 경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소방재난본부에 근무하는 한 지인에게서 “일본인 소유의 목조건물에 세 들어 살던 재일교포 가게에 불이 났는데 화재 원인을 두고 법정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재일교포에게 불리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니 직접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들은 후였다.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화재감식 담당인 서문 경사는 망설이지 않고 휴가를 낸 뒤 오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경찰은 1층에 세든 재일교포의 음식점 바닥에 버려진 담배를 화재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서문 경사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벽에 남아 있는 그을음을 보고 ‘잘못된 조사 결과’라는 것을 직감했다. 천장에서 목조 벽을 따라 내려가던 그을음은 바닥까지 가지 않고 어른 정강이 높이에서 멈춰 있었다. 만일 버려진 담뱃불이 원인이라면 그을음이 바닥부터 천정까지 곧장 이어져야 했다. 그는 “불은 아래가 아닌 위에서 났다”면서 “천정에 달린 환풍기 합선이 원인”이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환풍기를 뜯어보자 합선 흔적이 발견됐다. 관리 소홀로 화재 책임을 뒤집어쓸 뻔한 재일교포의 억울함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일본 법원은 서문 경사가 제출한 경위서를 근거로 판단을 바꿨다.

운명처럼 만난 ‘불’과 ‘경찰’

서문 경사는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경찰과 거리가 먼 전공이다. 어린시절 형과 동네 구석진 곳에서 불장난을 하다 옷가지와 양말을 태워 먹은 것 외에는 불과 인연을 맺은 일이 없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에 다니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며 그만둔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소방관이 되려는 친구를 따라 소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후 서점에서 순경 공채 수험서를 우연히 집어든 게 인생을 바꿔버렸다. 순경 공채시험에 덜컥 합격해버린 것이다. 가족들은 고생할 게 뻔하다는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 경사는 경찰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한테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1995년 26살 때의 일이었다.

경찰 생활은 파출소 근무를 시작으로 순탄하게 풀려나갔다. ‘나쁜 놈 수갑 채우는 형사’라는 게 기뻤다. 6년차 형사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상사인 형사계장이 “넌 형사보단 과학수사요원이 어울리겠다”는 말을 불쑥 꺼냈다. 서류를 꼼꼼하게 꾸미는 서문 경사를 눈여겨본 형사계장의 생각이었다.

당시 경찰의 과학수사(C.S.I)는 증거물 채취로 끝나지 않고 수집된 증거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었다. 이공계 학문 전공자가 그만큼 많이 필요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업무였지만,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 때 배운 지식이 요긴하게 쓰였다. 과학수사 요원으로 발탁된 직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하는 ‘화재감식전문화교육’을 이수한 뒤 화재감식 전문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서문수철 경사가 화재감식 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국내 경찰 가운데 몇 안 되는 미국 화재폭발조사관 자격증 소지자로, 경기도내 화재감식의 상당 부분을 직접 처리한다.

◆“현장을 발굴하라”

화재 감식현장에서 그의 움직임은 동물에 가깝다. 목격자 증언을 듣고 나면 일단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화재현장의 재를 싹 치우고 엎드려 밑바닥을 노려보기도 한다. ‘발굴’ 작업이다. 그가 오감을 총 동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너와 등유가 타고 난 자리는 냄새부터 다르다. 시너는 톡 쏘고 등유는 부드럽다. 만일 등유나 경유가 탄 곳이면 기름이 떠있다. 서문 경사는 “등유·경유는 휘발성이 약해 화재가 진압되면 공기 중에서 액체로 응결돼 바닥에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아직 후배들은 냄새를 맡는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거듭된 현장 경험에서 생겨난 그만의 동물적 감각이다. 경기지방경찰청이 1년에 처리하는 화재감식 사건이 650건 정도인데 이 중 250∼300건을 서문 경사가 처리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화재로 사람이 죽었다면 만사 제쳐 놓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2011년 경기도 광명에서 발생한 주부 사망 사건 규명도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단순 실화로 인한 인명사고로 쉽게 보아 넘길 수도 있었지만 사체의 모습이 흔한 소사체(화재로 사망한 시신)와 달리 일자로 죽 뻗어 있었다. 화재 현장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은 권투선수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게 정상이다. 살아 있는 근육이 불에 타 쪼그라들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곧게 뻗어 있는 소사체는 불이 난 당시 이미 근육이 죽어 있었다는 증거였다. 사람이 화재 현장에서 숨을 내쉬며 생기는 콧속 그을음도 발견되지 않았다.

서문 경사는 그 주부가 화재 당시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망을 좁혀가던 중 주요 용의자였던 남편의 자살로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단순 실화 사건으로 종결될 뻔했다.

그는 “화재사건으로 위장한 살인사건은 사체의 혈중 일산화탄소 농도가 아주 낮게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호흡을 하면서 혈액 내 일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히 높아진다”고 말했다.

서문 경사는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신봉한다. 불이 움직이는 형태와 그 불이 남기고 간 자리는 인간들이 숨기고자 했던 진실을 담고 있고, 그 진실의 한 면을 들춰내는 게 그의 일이다. 예컨대 방화사건은 실화사건과 불이 타는 형태부터 다르다. 불이 타는 형태가 V 자 모양이면 실화 사건이지만, U 자 모양이면 방화일 가능성이 크다. 발화지점에 뿌려진 기름에 불 밑자리가 더 넓게 타들어가기 때문이다.

화재감식은 방화범 검거는 물론이고 억울한 사람이 죄인이 되는 걸 막기도 한다. 3년 전 경기도 안양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그의 노력 덕분에 헤어드라이기 고장으로 인한 단순화재로 결론나기도 했다.

◆“한 번이라도 더 현장에 나가야 억울한 죽음 없어”

국내 최고 화재감식 전문가가 되기 위해 서문 경사는 요즘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2007년 경기대 소방도시방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듬해 충남대 과학수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논문을 준비 중이다. 앞서 2005년에는 미국의 화재폭발조사관 자격증도 획득했다. 미 화재조사관협회(NAFI)에서 시험을 거쳐 화재와 폭발, 방화조사 전문가에게 주는 자격증이다. 국내에는 그를 포함해 17명밖에 없다.

서문 경사는 “화재 원인은 셀 수 없이 많아 평소 전기·건축·화학·안전공학 등 다양한 공부를 해둬야 한다”고 말한다. 풍부한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그에게 대학은 물론 수사보안연수원, 소방학교 등의 강의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현장을 다녀온 날이면 그의 몸에서는 어김없이 매캐한 냄새가 난다. 몸을 씻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서문 경사는 그래도 “사무실에 앉아 있기보다 현장에서 냄새 맡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예고없는 화재사고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자신이 현장을 한 번이라도 더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현준 기자 hjunpar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