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 아래서

[정희진의 낯선사이]잉여

나무에게-- 2013. 10. 31. 09:37

일본 에도(江戶) 시대, 1690년에 직업의 종류는 530종이었다고 한다. 1920년 일본 국세(國勢) 조사에 신고된 직종은 약 19만종. 그로부터 85년 후인 2005년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직업이 생겨났을까? 놀랍게도, 3만종으로 6분의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일본 국립역사민족박물관이 펴낸 <생업으로 본 일본사>에서 이 자료를 읽고 내가 얼마나 진부한 인간인지 깨닫는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의 생활양식은 다양해지며…” 이러한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현실은 반대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획일화된다. 집에서 만든 한 벌 옷의 다양성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과 비교가 되겠는가. ‘우리나라’ 개념은 근대 초기 인쇄술 발달의 결과였다. 출판된 표준어 강요는 이질적인 언어와 생활양식을 가진 소수민족들을 국민으로 통합시켰다. “세계는 하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내용의 TV를 본다. 심지어 성형수술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개성은 소비를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성은 존중하지만 인권은 억압한다.

힘든 시대다. 30대 명퇴, 청년 실업과 취업난, 소매상 도산, ‘88만원 세대’, 양극화, 교실 붕괴…. 얼마 전 모 대기업의 입사 시험에 9만명이 응시했다는 기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을 다 어떻게…. 요즘은 어딜 가나 수백 대 일 경쟁은 기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람으로 오해받지만, 사실 그는 자본주의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그런 그도 말년에는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세상에 진입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본주의의 ‘자가발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자본주의는 글자 그대로 ‘비약(飛躍)’하고 있다. 굉음과 광속을 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 인간의 각성과 폭력적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는 지구의 종말을 믿는다. 날짜를 못 맞출 뿐이다.

간단히 말해, 현재 자본주의는 혼자 성장해서 인간의 노동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자본과 인간이 경쟁하고 있다. 불과 100여년 전에, 1000원의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1000명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똑똑한 한 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사는 동네 은행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명 정도가 근무했다. 지금은 3명이 앉아 있다. 모두 기계화되고 그나마 한 명은 프라이빗 뱅킹 담당이다.

자본주의 초기, 노동자 양성과 훈육을 담당했던 학교와 군대의 기능은 무기력해진 지 오래다. 99%의 학생들은 자신이 들러리라는 것을 안다. 군사(軍事)는 첨단무기가 보병을 대체하고 있다. 20:80의 양극화 사회라고 전율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른바 세계화. 지금은 99.1%:0.1%의 사회다. 0.1%의 사람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가시권에서 사라졌다. 투쟁의 대상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힐링이니 자기 계발이니 하며 자신과 싸우고 있다.

원래 잉여(surplus)는 남는 장사, 이익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잉여가 되었다. 없어도 되는 사람(useless). 전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절박하게 대안을 찾고 있다. 유독 대한민국 정부만 관심도 개념도 대책도 없다. 노동운동은 정규직을 외치고 있다. 나는 두 세력 모두에게 좌절한다.

자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정규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규직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면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4시간 일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100세 시대’에 30대부터 잉여로 살아야 할 판이다. 아니, 이미 그런 시대다. 캥거루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캥거루족’은 그나마 중산층 부모를 둔 잉여들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잉여이거나 잉여 직전인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의 공포에 떨면서도 먼저 잉여가 된 이들에게 안도감과 경멸을 느낀다. 심지어 오로지 잉여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비극도 있다. 남아시아의 몇몇 부족들은 식량 부족과 인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 전쟁으로 인구를 ‘조절’한다. 이렇게 보면, 저출산은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인구를 국력으로 생각하는 국가주의, 남성 생식력 숭배 문화, 고령자에 대한 편견이 저출산을 문제로 만들었다.

이 지옥을 주도한 사람들은 패닉 룸으로 도망치겠지만, 종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태는 인간이 원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변화 역시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 새 역사 창조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국민이 잉여가 아닐 때는 선거 때? ‘댓글 정치’를 보면 그마저도 아닌 것 같다.

<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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