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 아래서

우리는 왜 항상 좀더 많이 생산하려하는 것일까? 페북 논박 모음

나무에게-- 2013. 10. 18. 08:35

평소 페이스북에서 좋아하는 글을 종종 올리는 이진경씨의 잉여와 자본주의, 산업혁명 이전의 글들에 대해 개발, 발전, 산업화 이로 인한 인간의 삶이 더 풍족하고 좋아 졌으며, 이런 풍요의 바탕이 곧 자본주의가 낳은 잉여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대한 답변과 재반박 등을 모아 보았다.

특히 이진경씨가 김기보씨의 반박이 "상식과 통념에 충실"하다고 했고 사실 누구나 가져볼 만한 일반적인 생각이기에 반론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잉여와 잉여가치설 등의 내용이 좀 헷갈리기도 해서 혼란스러워 다시 읽어 보고 이해하려고 메모해 둔걸 다시 정리해 보았다.

결론은 내가 이해한 부분과 많이 틑리지는 않았던것 같다. 

하지만 "상식과 통념에 충실"한 질문을 누가 내게 한다면 나는 어떻게 답변할수 있을까는 고민이 좀 된다. 

이해한 것과 내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부분을 잘 설명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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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우리는 왜 항상 좀더 많이 생산하려 하는 것일까?(1)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산이란 분리되어 있던 요소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종합이다. 소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생산이란 엄마의 유전자와 아빠의 유전자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종합이고, 지식의 생산이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식이나 경험, 사실이나 해석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지식을 산출하는 종합이다.

 

그러나 생산은 통상 이런 넓은 의미보다는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생산으로 국한되어 사용된다. 그 경우에도 생산은 종합이다. 돼지의 살과 숙주나물, 당면, 밀가루와 물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만두로 만들어내는 것, 메모리칩과 연상장치, 플라스틱과 금속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컴퓨터를 산출해내는 것 등등.

 

그런데 여기서 쉽게 잊는 것은, 이런 생산적 종합에는 원료만이 아니라 일하는 이들의 노동이 섞여들어가고, 컴퓨터가 그렇듯 이런저런 지식이, 그리고 예술작품이 그렇듯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섞여들어간다. 지금은 원료나 노동 이상으로 지식이나 창의성이 생산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들 하지만, 예술작품은 물론 오래된 음식이나 옷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생각해보면, 새로운 것의 생산에는 언제나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은 이런 생산을 언제나 비용과 산출의 양적인 관계 속에서 다룬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된 비용이 적을수록, 그리고 그렇게 산출된 생산물의 양이 많을수록 그것은 ‘경제적’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 경제라는 말이 절약, 효율, 저렴함 등을 함축하고 있음을 안다면,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같은 값이면 좀더 빨리, 좀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것은 단지 비용의 절감만이 아니라 생산방식 자체의 효율성을 뜻하는 것이다. ‘투입량 분의 산출량’으로 정의되는 ‘생산성’의 공식은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좀더 높은 생산성의 추구, 그것은 기업이든 국가든, 단체든 개인이든, 심지어 에너지학의 관점에서 ‘생태적 효율성’을 따지는 생태학에조차 공통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최소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것이 벤섬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공리주의’의 근본원리다(흔히 공리주의라는 말로 떠올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구호는, 그 앞에 ‘같은 비용으로’, 혹은 ‘최소비용으로’라는 말이 생략된 것임을 상기하지 않으면 크게 오해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전복을 꿈꾸었던 사회주의자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역사 관념은 생산력발전을 일차적인 동력으로 삼아 전개된다. 생산력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 그것이 역사적 발전이다. 맑스는 생산력이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이는 어느새 ‘생산성’이란 말로 대체된다. 그렇기에 레닌조차 좀더 높은 생산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란 점에서 테일러주의와 ‘과학적 관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가스체프라는 사람이 테일러처럼 대장장이의 노동을 분석하여 시간관리, 동작관리의 방법을 생산과정에 도입하고자 했던 것도 이런 점에서 보면, 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생산력에 대한 예찬, 그것은 사회주의에서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생산성의 상승을 추구하는 것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의 ‘본성’에 속한다거나, 모든 사회에 공통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세상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샬 샬린스나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인디언 사회를 연구하여, 이런 생산의 관념에 반하는 태도가 널리 일반화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가령 돌도끼를 남미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쇠도끼가 10배는 더 '생산적‘임을 알고 그것을 탐냈지만, 정작 그 도끼를 얻었을 때 그들은 예상과 달리 기존에 생산하던 것보다 10배를 더 생산한 게 아니라, 이전보다 10분의 1만 일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언제나 원시인들의 무지를 탓하고 비난하길 좋아하는 백인들은, ’이 게으르고 미개한 부족‘이라고 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아니, 쇠도끼를 사용하면 이전보다 10배는 더 생산할 수 있는데 왜 그것만 생산하고 마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논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을 것이다. “뭐 하러 그렇게 많이 생산하는데?”

 

이진경

우리는 왜 항상 좀더 많이 생산하려 하는 것일까?(2)

모든 원시부족들에게 먹고사는데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를 생산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반대로 필요와 상관없이 일단 최대한 생산하고 보는 ‘문명화된’ 생산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원시사회에서 그런 ‘잉여의 생산’은, 가령 필요 이상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이후 사냥할 동물을 감소시킨다는 '계산적‘ 관점에서도, 또 쓸데없이 생명을 죽인다는 윤리적 관점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또한 그런 필요 이상의 잉여를 생산하여 비축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복종이나 채무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짓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잉여를 반복해서 일삼아 파괴하고 소모했다. 자기가 받은 것보다 좀더 많은 선물을 주는 자가 승리하는 ‘증여 게임’인 포틀래치에서, 인디언들은 단지 증여만 하는 게 아니라 과도한 음식으로 여분의 식량을 소모하고, 담요를 태우고 집을 불태우며 소중한 물건을 뽀개버리기까지 한다.

 

‘야만인은 게으르다’는 관념이 백인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실제로 게으르다. 클라스트르의 계산에 따르면, 남미의 투피과라니족 남자들은 4년에 2달만 일했다. 인류학자 리조는 베네주엘라의 아마존지역에 사는 야노마미족 성인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3시간을 약간 넘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칼리하리 사막의 수렵채취민도, 아메리카의 농경민도 하루 노동시간이 평균 4시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241쪽)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아주 놀라운 것이다. 비교할 수 없이 문명화되고 생산성이 발전한 서구나 한국에서 성인남자의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을 넘지 않는가! 그래서 클라스르트는 묻는다: “대체 어디가 더 ‘발전’한 사회고, 대체 어디가 더 ‘진화’된 사회인가?”

무엇이 이 당혹스런 결과를 빚는가는 명확하다. 어떤 경우든 필요한 것을 초과하는 잉여의 생산은 생산하는 자의 욕구와 무관한 것이고, 그를 생산하게 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생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전의 어떤 사회와도 비교할 수 없이 생산성의 비약적 상승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이전의 어떤 사회보다도 노동시간을 확대했다. 19세기초, 생산성 비약의 결정적 계기인 산업혁명의 결과가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 그 시기 영국의 하루 노동시간은 평균 16~18시간이 기본이었다. 그 긴 시간의 노동과 생산이 생산자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한 것이었음은 잘 아는 바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값이면 좀더 많이 생산한다”라는 생각은 노동자나 생산자가 아니라,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이 ‘다른 누구’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효율성’이란 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좀더 효율적인 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좀더 편한 것을 찾는 것과 반대로, 덜 편한 것을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덜 효율적인 것에도 어떤 긴요한 장점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적 안경으로는 보이지 않기에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생산’이란 말에서 좀더 높은 생산성 추구를 자동으로 떠올리는 것은, 이처럼 타인으로 하여금 잉여를 생산하게 하고 그것을 착취하는 그런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 ‘생산성’ 공식 속에 항상-이미 함축되어 작동하는 공리주의는 생산자의 욕구가 아니라 비용을 댔기에 결과를 가져가는 자, 즉 자본가의 욕구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자들의 생산성 예찬은, 착취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고 하면서도 이런 착취자의 공리주의를 자연스레 여기는 것이란 점에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생산력은 생산성이 아니다. 생산력이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라는 맑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사례를 레비스트로스는 전해준다. 그에 따르면, 남미의 보로로족은 활과 화살로 사냥을 하는 부족이다. 언제인가 인디언 보호국 관리들이 이들에게 총을 갖다 주면서 그걸 사용하여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가 그들 마을에 들어가서 살 때, 그들은 총은 집안에 장식용으로 걸어두고 계속 원시적인 도구로 사냥을 했다고 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총으로 동물을 잡는 것은 동물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사냥은 사냥꾼이 힘들여 쌓은 능력을 동물의 능력과 대결하며 해야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잡을 이유가 없다는 것 또한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즉 보로로족에게 사냥도구의 선택이나 사냥의 방식은 자본주의와는 아주 다른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력 역시 인간과 자연 간의 다른 종류의 관계를 표현하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산이란 이처럼 관계에 따라 아주 다른 것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거 아닐까?


김기보 

1. 야노마모족은 잦은 전쟁과 질병으로 평균수명이 40세가 안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80세까지 살며, 평균 노동년수는 40년입니다. 0~20세, 60~80세 근 40년을 놀고 먹는 셈입니다. 그럼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쳐도 평균잡으면 4시간도 안되는 셈입니다. 원시부족들은 10세도 안되어 실제로 일을 하기 시작하니까요. 노동시간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주말도 없습니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고 누가 더 편하게 사는지요?

 

2. 현대인이 높은 생산성으로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은 결코 ‘잉여’가 아닙니다. 야노마모족은 태어나자마자 영아살해와 소아마비, 그리고 아동노동과 전쟁, 성폭력에 시달립니다. 현대인은 안전하게 태어나고, 무료교육을 받으며, 의료서비스를 받고 법률과 치안과 안보서비스를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공짜가 아니지요. 책, 음반, 자전거, 자동차, 조리도구, 아파트, 스마트폰, 해외여행 이런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합니다. 사실 야노마모족 수준으로 소비하려면 하루 삼십분만 일하면 될 것입니다. 반면 야노마모족은 부족한 단백질과 여성을 사냥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입니다. 어느 쪽이 과연 진보된 사회일까요?

 

3. 산업혁명이전의 노동자의 삶이 목가적인 핑크빛 삶일 것이라는 것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나요? 실제로 그 이전 평민의 아동들이 선택하는 삶이란 귀족의 하인/하녀가 되어 장시간노동과 성착취를 당하거나 영양부족과 질병으로 굶어죽거나 농업노동에 시달리거나 하는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나서 비로소 ‘아동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의무교육’으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죠. ‘우유’와 ‘흰빵’은 귀족만의 전유물이었지만 산업혁명이후에는 노동자들에게도 맛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전염병백신은 어떤가요? 과학과 의료서비스 또한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노동자의 삶이 실질적으로 나아졌는데 산업혁명을 ‘착취’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조선시대 며느리의 삶이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가사노동과 농업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에게 ‘인권’이란 것이 있었나요?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가능했던 사례가 있습니까? 법률과 치안, 행정서비스도 궁극적으로는 생산력의 연장입니다.

 

4. 레비스트로스나 이진경씨가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원시부족의 삶은 실제로는 그냥 그들의 ‘관성’이 표현된 일부사례가 아닙니까? 오늘날 이누이트족은 모터보트를 타고 소총으로 고래를 사냥합니다. 더 많이 잡아서 빨간색 닷지트럭을 사지요. 관광객이 찾아오면 개썰매를 태워줄테구요. 실제로 김병만씨가 출현했던 TV프로그램의 ‘원시부족’들은 모터보트를 출근해서 원시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관광객들에게 독화살로 사냥하는 ‘생태투어’를 제공하고 현대식주택으로 퇴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누가 강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편하게 살려는 본능 말입니다.

 

5. <<이처럼 타인으로 하여금 잉여를 생산하게 하고 그것을 착취하는 그런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 >> 혹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들고 오신건가요? 잉여가치론은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이미 논파가 된 옛날이론이 아니던가요? 오늘날 HTC의 폰과 아이폰은 똑같이 폭스콘의 노동자들 손에서 조립되지만 아이폰은 그 두배의 값으로 팔립니다. 잉여는 어디에서 착취되나요?


Park Heehong 

김기보님의 반론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반론입니다. 하지만, 글쓴이의 의도를 보지 않고 문장만 보시는 건 아닌지요. 대걔 의중을 표현하기 위해 특정 내용을 강조하게 되는 데 글쓴이의 강조점은 원시인의 질병, 고통, 죽음이 아닌걸로 보입니다.

 

글쓴이의 의도를 다른 식으로 옮겨봐 드립니다.

저는 하던 일이 잘 안되서 부족한 소득을 위해 몸으로 하는 일(막일)을 짬 내서 하고 있습니다. 몸이 너무 힘들더군요.

그래서 그런 힘든 일을 대신해 줄 로봇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힘든 일을 대신해 줄 로봇이 있으면 내가 편해 질까요?

그 답은 아니올씨다... 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의 현장에는 로봇이 도입되었고, 한 대의 기계가 사람 2~30명 분을 대신해 주고 있었지만, 저의 노통고통이 줄지 않았습니다. 왜그럴까요? 그건 그 로봇이 저의 것이 아니기에 그 로봇이 만든 "대단한" 생산성 향상은 저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는 동일한 수준의 노동강도를 요구받고, 그 보수를 받는 걸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제기랄... 사람이 더 적게 필요해진 부분만큼 사람을 적게 고용하데요. 결국 저는 그나마 몇 푼 안되는 일자리마저 잃어버릴 위험에 노출이 됩니다... ㅠㅠ

 

어떠세요? 상황이 좀 공감이 가시나요?

 

글쓴이의 의도는 생산성 향상이 그 일을 한 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댄 자에게 귀속되고, 심지어는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일자리를 잃는 위험과 잉여노동력의 증가로 인해 인력의 수요공급원리에 따라 기존 급여보다 더 적은 급여소득자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봤는데요,,, 아닌가요?

 

당연히 생산성이 향상되면 좋습니다. 하루 10시간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부족이 3시간만 일해도 풍요로울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자연인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산다고 행복해졌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보통은 자본가(실체는 지배자)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경우라고 봐야죠. 사람의 삶의 풍요로움은 걸어다니던 사람이 자동차 타고다닌다고 더 행복해 졌다고 단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게 철학이고 관념이고 사유가 아닐까요?


현정훈 

이진경님의 글에 대한 댓글들을 보면 원시부족의 삶을 낭만적으로 동경하는 글이 제법 있습니다. 생산성, 효율을 그 자체로 좋으냐 나쁘냐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인간이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을수도 나쁠수도 있으니까요.

마음을 비우라거나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거나 하는 인간본성 운운하는 말은 생산성의 이익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하는 계급적 관점을 희석시키게 됩니다.

잉여가 불필요한 게 아니라 그 잉여를 어떻게 나누고 활용하느냐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진경님의 글도 이런 의미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만, 총 대신 화살을 고집한 보로로족 얘기가 동물을 모욕해선 안된다는 말로 더 크게 들리는 건 사실 안타까운 일 입니다. 총으로 보로로족의 먹을꺼리를 남획하다보면 종국엔 먹을 게 남아나질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진경님의 글, 사회주의에서의 생산력 예찬에 대한 비판이나 인디언의 담요, 집을 태우면서까지 잉여를 소모했던 예의 요지는 생산성, 효율을 우리가 주인이 되어 활용해야지 생산성, 효율이 주인이 되어 우릴 좌지우지 하게 해서는 안된다로 읽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진경

두통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체력은 아직도 바닥인 상태인데,

그 동안 페북을 '빈집'으로 만들어놓은 듯하여, 잠시...

전에 생산, 생산, 생산타령을 하고, 생산성 극대화라는 공리주의의 이념을 정신없이(그런 건 줄 생각 않은 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며, 인류학자들의 원시인들 얘기를 언급했었지요.

그에 대해 한 분이 꽤 길게 반박을 했는데, 사실 페북은 논쟁할 공간으로 적당하지 않으며, 더구나 저는 '논쟁'이란 게 논의의 발전에 그다지 기여하지 않고 서로 방어하며 자기 논지만을 반복하게 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논쟁은 엔간하면 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반박은, 상식과 통념에 충실한 것이기에, 시간 나면 반박하겠다고 했는데,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약속한 건 지켜야지 싶어서, 간단히 제 생각을 말해보려 해요.

먼저 그 분의 얘기를 옮겨 놓고, 그에 제 생각을 간단히 밝히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1. 야노마모족은 잦은 전쟁과 질병으로 평균수명이 40세가 안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80세까지 살며, 평균 노동년수는 40년입니다. 0~20세, 60~80세 근 40년을 놀고 먹는 셈입니다. 그럼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쳐도 평균잡으면 4시간도 안되는 셈입니다. 원시부족들은 10세도 안되어 실제로 일을 하기 시작하니까요. 노동시간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주말도 없습니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고 누가 더 편하게 사는지요?

-->19세기 문명화된 서양의 평균수명도 32세 정도 입니다. 식민지 조선은 1930년대에도 평균수명은 그 정도 였습니다. 임상의학에 의해 유아사망율이 크게 낮아지기 이전의 사회는 어디나 비슷했습니다.

60세~80세 노인이 놀고 먹는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젊을 때 모은 돈이 없으며 종이를 줍는 걸로 인생 말년을 보내게 되는 게 우리 사회 아닌가요? 지금 한국의 60세 이상 노인의 자살율이 놀라울 정도로 높다는 건 포탈에 뜨는 기사에서도 자주 보는 것이지요.

20세까지 놀고 먹는 것은, 사회가 멕여주어서가 아니라, 부모가 노동하여 멕이는 것이지요. 이런 걸 놀고 먹는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의할 것은 이런 것은 서구에서도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진사 책을 보면 어디나 나오는 루이스 하인의 사진을 검색해보시면, 1910년 경 통조림 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6~7세의 어린이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맑스의 <자본론>에 인용된 공장근로감독관들의 보고서를 보면,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의 영국에선 5~6세 된 아이들이 하루 15시간의 노동(릴레이제도를 통한 속임수가 있었습니다)을 해야 했지요. 그게 처참하여 유아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이 1840년대 만들어지지만, 릴레이제도라는 속임수로 아무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원시부목의 아이들이 했다는 노동은, 방정환이 한탄하던 조선의 농사짓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일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산업혁명이 혁신한 저 끔찍한 아이들의 노동과 비교할 때, 정말 누가 더 편하게 사는 건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2. 현대인이 높은 생산성으로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은 결코 ‘잉여’가 아닙니다. 야노마모족은 태어나자마자 영아살해와 소아마비, 그리고 아동노동과 전쟁, 성폭력에 시달립니다. 현대인은 안전하게 태어나고, 무료교육을 받으며, 의료서비스를 받고 법률과 치안과 안보서비스를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공짜가 아니지요. 책, 음반, 자전거, 자동차, 조리도구, 아파트, 스마트폰, 해외여행 이런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합니다. 사실 야노마모족 수준으로 소비하려면 하루 삼십분만 일하면 될 것입니다. 반면 야노마모족은 부족한 단백질과 여성을 사냥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입니다. 어느 쪽이 과연 진보된 사회일까요?

-->야노마미(이게 맏을 겁니다)족만이 아니라 많은 원시부족사회가 전쟁이나 폭력을 행했음을 부정하는 인류학자는 없습니다. 다만 그 전쟁이 '단백질과 여성을 사냥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19세기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야만인'과 '미개인'으로 그들을 채색하여 그들의 정복을 '문명화'라고 치장할 때의 생각이라는 걸 부정하는 인류학자도 지금은 없을 겁니다. 제가 인용한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를 '전쟁'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라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이유는 국가의 형성을 저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그의 관찰입니다.

하나의 이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야만성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서구인, 혹은 '우리'의 시각에서 보는 것은, 제의적인 '식인'의 풍습을 단백질 보충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것입니다.

또 하나, 30분이면 충분할 일을 왜 우리는 30분이 아니라 8~10시간씩 일을 할까요? 소비를 위해서? 반대 아닐까요? 8시간, 10시간 일하게 하기 위해, 소비라는 미끼를 계속 던지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10년써도 될 전화기를 2년이면 바꾸게 하고, 10년 입을 옷을 한계절 입으면 버리게 만드는 가속화된 유행의 체제를 가동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요?(<유행 색 협회> 같은 게 있는 건 이 때문이겠지요.)


3. 산업혁명이전의 노동자의 삶이 목가적인 핑크빛 삶일 것이라는 것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나요? 실제로 그 이전 평민의 아동들이 선택하는 삶이란 귀족의 하인/하녀가 되어 장시간노동과 성착취를 당하거나 영양부족과 질병으로 굶어죽거나 농업노동에 시달리거나 하는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나서 비로소 ‘아동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의무교육’으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죠. ‘우유’와 ‘흰빵’은 귀족만의 전유물이었지만 산업혁명이후에는 노동자들에게도 맛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전염병백신은 어떤가요? 과학과 의료서비스 또한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노동자의 삶이 실질적으로 나아졌는데 산업혁명을 ‘착취’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조선시대 며느리의 삶이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가사노동과 농업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에게 ‘인권’이란 것이 있었나요?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가능했던 사례가 있습니까? 법률과 치안, 행정서비스도 궁극적으로는 생산력의 연장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아동인권이 어땠는지는, 앞서 1번에서 약간 말했지요. 정말 처참했습니다. 그 이전엔 여성이나 아동은 일하고 싶어도 일하기 어려웠습니다. 영국의 경우, 장인 밑에서 7년 이상의 도제생활을 하지 않으면 노동할 수 없었거든요.

그리고 톰슨이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나 <Custums in Commons> 같은 책에서 자세하게 보여주듯이, 산업혁명 이전에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고, 그래서 결근하고...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도입되고 장인적 노동이 기계적 동작으로 해체되면서, 숙련 없이 노동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이나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공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루이스 하인의 사진을 보면, 1910년대에조차 이런 사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아노동을 하지 않게 된 건 모두 저 루이스 하인 덕분입니다. 신문에 그의 처참한 사진들이 실리게 되면서 유아노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새로 비등했고, 그 덕분에 유아노동을 실질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집니다.

노동시간도 그렇습니다. 산업혁명 이전 영국에는 최저노동시간을 규정한 법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도 안 하니까 국가와 법을 동원해 최소노동시간을 정한 거지요. 그게 10시간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노동시간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요. '싫으면 그만 둬.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저기 줄을 섰거든'

차티스트 운동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이 처음 만들어졌던 게 아마 1840년대일 겁니다. 그때 법정최고노동시간이 얼마였는지 아시나요? 15시간이었습니다. 업종에 따라 16시간도 있었구요. 실제 노동시간은 당근 16시간 이상이었겠지요. 믿을 수 없지만, 근로감독관 보고서에 따르면 18시간 이상도 있었다고 해요. 산업혁명, 그거 사실은 끔찍한 반혁명이었던 겁니다. 노동자들이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운동)을 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저는 맑스주의자이지만,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4. 레비스트로스나 이진경씨가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원시부족의 삶은 실제로는 그냥 그들의 ‘관성’이 표현된 일부사례가 아닙니까? 오늘날 이누이트족은 모터보트를 타고 소총으로 고래를 사냥합니다. 더 많이 잡아서 빨간색 닷지트럭을 사지요. 관광객이 찾아오면 개썰매를 태워줄테구요. 실제로 김병만씨가 출현했던 TV프로그램의 ‘원시부족’들은 모터보트를 출근해서 원시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관광객들에게 독화살로 사냥하는 ‘생태투어’를 제공하고 현대식주택으로 퇴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누가 강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편하게 살려는 본능 말입니다.

 

-->지금 '원시부족'이나 '인디언'이 예전처럼 카누 타고 할 거라고 누가 생각할까요? 그건 마치 원래 그들에겐 토지소유관념이 없었다는 말을, 지금 그들이 토지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들어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질 겁니다.

사실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예전에 호주에서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상대로 원래 호주 토지가 자기들 것이었으니 돌려달라는 소송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노동당 정부 때여서였는지, 법원에서 원주민 (부분)승소 판결을 냈다고 해요.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백인들이 소유한 토지 모두가 사실은 원주민 것을 강탈한 것이니까요(미국도 그렇지요. 아, 물론 속임수도 있었지요). 그때 상급법원이나 백인법학자들이 그 판결을 뒤집기 위해 동원한 논리가, 원주민들은 원래 토지소유 관념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습관이고 문화고 심지어 경제적 강제입니다. 우리가 공장에서 더많이 생산하는 것은 본능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강제 때문이고, 더많이 소비하는 것은 습속, 아니 이 또한 강제 때문입니다. 가령 유행지난 옷을 입고 면접을 가는 것은 면접을 포기한 행위지요. 없어도 유행하는 옷을 입고, 가능하면 성형도 하고 가야 합니다. 핸드폰을 2G나 3G를 쓰는 건, 늦어진 속도를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그게 없으면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유'의 형식을 빌지만, 사실은 강제지요. 지금 사회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자유'지만, 사실은 강제인 것처럼.


5. <<이처럼 타인으로 하여금 잉여를 생산하게 하고 그것을 착취하는 그런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 >> 혹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들고 오신건가요? 잉여가치론은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이미 논파가 된 옛날이론이 아니던가요? 오늘날 HTC의 폰과 아이폰은 똑같이 폭스콘의 노동자들 손에서 조립되지만 아이폰은 그 두배의 값으로 팔립니다. 잉여는 어디에서 착취되나요?

-->뒤집어 생각해봅시다. 자본가 입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할 때, "일을 시켜서 이윤(이게 잉여지요)이 남지 않는다면, 왜 내가 너희를 고용하겠니?"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건 이윤, 잉여가 생산의 목적임을 아주 명확히 말해주는 거 아닌가요?

그 잉여가치를 남기는 법이 애플과 삼성이 다르고, 그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법이 현대와 효성이 다를 것이고, 그에 따라 그들이 얻는 잉여가치(의 양과 비율)은 다르겠지만, 어디든 '이윤 없는 생산'을 할 생각이 없음은 분명합니다. 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입니다. 그렇기에 먹고사는 거 생산하는데 30분이면 충분할 것을 8시간 이상 일을 시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원시인보다 생산성은 지극히 높지만 노동시간 또한 그들보다 긴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거지요.

저는 맑스주의자이지만, 단지 맑스가 말했기에 옳다고 믿는 바보 같은 맑스주의자는 아닙니다. 그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의 연구에서 이리저리 확인한 것들이고, 내가 보고 관찰한 것을 갖고 쓰고 생각합니다. 여기 쓴 것이나 앞에 쓴 것이나, 공연한 관념이나 이념으로 대충 말한 것은 아니니, 진지하게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그리고 이에 대해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을 생각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김기보

1. 현대사회에서 30분의 노동이란 하루에 필요한 삼각김밥 세개를 사기에 족할 뿐입니다. 이진경 님께서 애써 말씀하신 임상의학을 발전시키고 소아마비백신을 발명시키는 생산력은 어디서 옵니까? 나머지 7시간 30분의 노동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조선시대처럼 노동시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7시간 30분의 노동안에는 임상의학을 발전시킬 비용과 소아마비 비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어진 인생의 이십년을 노동하지 않고 살아갈 연금도 물론 생산하고 있지요. ( 폐지줍는 할머니를 예로 들어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 할머니들을 먹여살릴 기초연금은 어디서 나오나요? 그분들이 국민연금세대입니까? ) 그것들은 모두 공짜가 아니며, 잉여도 아닙니다.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어떻게 '남아도는 것'(잉여) 일 수 있나요? 조선시대 부모들이 우리와 같은 생산력을 가졌다면 굳이 노동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아동노동의 개념과 실천 또한 그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헛일일뿐이지요. 노조가 아무리 강철같이 파업을 해도 사장이 올려줄수있는 임금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2.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잉여가치 학설에 따르면, 그리고 이진경 님이 주장하는 이윤이라는 것에 따르면, 모든 동일한 노동에는 동일한 이윤이 남아야 합니다. 하지만 베가와 아이폰에 들어가는 노동이 동일함에도 동일한 이윤은 남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잉여가치학설에서 설명이 안되는 그것들은 한계효용이론으로 설명이 되었고, 오늘날 경제학에서 잉여가치학설이라는 것은 전설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공부하지 않은채, 이진경님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아이폰의 디자인과 UX는 베가의 그것과 다릅니다. 스티브잡스는 그것을 발명해냈고 그것은 자본가의 생산계획과 결정이 단순히 남의 노동을 가져다가 쓰는 착취가 아니란 것을 보여줍니다. 이윤이 잉여가 아니라 자본가의 노력의 결과라면 님의 이론은 도대체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요? 이윤과 잉여부터 다시 증명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30분만일하면 아이폰이 뿅하고 나오고 모두 쓸수있다니 정말 놀라운 이론이군요.

 

3. 인디언과 백인이 접촉했을때, 그들사이에 거래된것은 성능이 좋은 총이었습니다. 그것은 '강제'였나요? 인디언이 총으로 버팔로를 사냥했죠. 그것은 '자유'인가요? 아니면 '자본에 의한 강제'였나요? 먹고살아야 하는 노동이라는 점에서 강제일 수 있겠지만 인디언이 총으로 잡은 고기를 남김없이 먹었다는 점에서 그게 어떻게 강제일 수 있을까요? 여자들은 예뻐지기 위해서 더 많은 소비를 합니다. 그것은 '자본에 의한 강제'인가요? 더 높은 지위의 남성을 잡으려는 전략이 아니구요? 더 효율적인 노력으로 더 많은 소비를 하는 것이 강제라면 그 강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30분만 일하면 삼각김밥으로 하루를 게으르게 살 수 있지만 말이지요. 물론 짝짓기 경쟁이 유전자에 의한 강제라면 그런 용법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만. 건강하게 오래살기 위해서 우리는 강제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디 악마라도 숨어있나요?

 

4.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습관이고 문화고 심지어 경제적 강제입니다. " 어떤 외계인이 지구근처에서 머물면서 인간의 역사을 압축해서 본다면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겁니다. 굉장히 다른 수천의 문명권이 보편적으로 하나의 생산양식과 사회로 수렴이 되고 통합이 되는 모습 말이지요. 그러면서 그 외계인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겁니다. 인간의 습관과 문화가 하나로 발전되어 가고 있는게 이건 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1. 현대 사회의 30분 노동이 삼각김밥 3개를 창출해내는게 아니라, 소득분배 구조를 거쳐서 삼각김밥 3개를 사먹을 돈을 노동자에게 지급하는겁니다. 말은 정확해야 합니다. 대기업 회장의 30분이 삼각김밥 3개인가요? 공장 시스템과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의 분배가 언제나 합당한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을 놀게 하는 노동이 반드시 7시간 30분일 필요는 없는겁니다.

 

2. 한계효용이론은 자본주의 내의 분배 문제를 다룬 이론일뿐입니다. 오히려 지금 그렇게 강조하시는 노동시간이 잉여가치설의 근본인데요? 교역 자체에서 자본 축적을 증가시키는 힘은 발견되지 않는다, 더 많은 노동이 자본 축적을 가져온다. 이게 잉여가치설의 핵심입니다. 잉여가치설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잉여가치설의 근본을 이루는 주장을 하고 계시는 놀라운 발언입니다.

 

3. 더 많은 소비를 하는건 본능이 아닙니다. 여러가지 인간이 가진 성향 중 일부일뿐이죠. 인디언과 백인이 접촉했을때 백인이 준건 총과 말이지만, 뺏어간건 생명과 터전, 문화입니다. 누가 총과 말을 줄테니 이기보님의 생명과 터전, 삶의 방식을 뺐는다고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걸 자유라고 부르는건 황당한 일입니다. 악마? 자본이 모든 면에서 악마는 아니지만, 어떤 측면에선 악마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분마저 부인하실겁니까?

 

4. 그건 이기보님의 환상일뿐입니다. 사실 많은 형이상학적인 역사철학들이 걸어왔던 길이기도 하니, 너무 큰 비난은 하지 않겠습니다. 현재가 하나의 질서에 의해 조화롭고 발전적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환상. 물론 그런 구도 자체가 나쁜건 아닙니다. 지금 현재는 전혀 사실이 아닐뿐이라는게 일단 가장 중요합니다. 세계 전체를 보면, 세계는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지도 않았고 평화롭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도 않죠. 중동의 혼란, 아프리카의 혼란을 무어라 말할수 있을지요. 극단적인 예이지만 충분히 유효한 예입니다.

그 근본 이유를 체제 발전이 완결되지 않아서로 생각할수도, 체제 자체의 한계점 떄문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만,

이 부분을 부인해서야 아예 논의 자체를 할수 없는 노릇입니다. 몇몇 사람들의 환상일뿐이죠.


김기보 

1. 조선시대에 삼각김밥 세개씩의 쌀을 생산하려면 하루 삼십분의 노동으로 족했을까요? 그리고 그때의 분배와 지금의 분배를 한번 비교해보시지요. 더 부당해졌나요? 더 많아졌나요?

 

2. 노동시간이 절대적으로 동일해도 이윤은 다르지요. 그럼 잉여가치이론은 그것을 뭐라고 설명하나요?

 

3.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 인간의 본능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에서 왔나요? 자본은 누가 움직입니까? 악마가 그속에 숨어 있나요?

 

4. 저는 그것이 조화롭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조화로운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가치여부를 떠나서 현실이 그런식으로 통합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바그다드나 나이로비에서도 인간의 본능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김기보 

흥미롭군요. 여기 오신분들이 다들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들일텐데. 30년전 부모님의 노동시간과 본인의 노동시간을 비교해보시지요. 그리고 자동차/해외여행/스마트폰/치과진료의 가격도 한번 생각해보시구요.


강길모

 1.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건 맞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진경 선생님의 답변은 그 폭발적인 생산량의 증가 과정 중에 일어났던 일이, 그 이전의 상황보다도 훨씬 끔찍했다는 겁니다. 지금 그 30~50년전의 상황, 부모님 세대의 상황이 바로 그 과정이었던거고요. 우리나라 노조(어용노조 말고) 인가받은게 90년대 일입니다. 답변의 의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걸 인증할뿐입니다.

 

2. 분배가 다른거라고 말씀드렸지요? 지금 말씀하시는 개념은 임금의 차이를 의미할뿐인거죠. 1시간의 노동이라도 그 강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창출되는 이윤은 다릅니다. 잉여가치론의 이윤 개념은 현실세계에서의 개별노동이 아니라, 이것들을 추상화해서 일반화한 개념입니다. 이론을 비판하려면 그 이론에서 뭘 말하는지는 이해하셔야지요.

 

3. 문화인류학의 연구 결과라는게, 그런 현상이 인간의 절대적인 본능이 아니라는 면을 말해주는 겁니다.

더 많은 소비를 하고, 더 많은 생산을 하고, 거기에 사회적 여력을 총투입하는게 어떻게 본능이라는겁니까? 그게 본능이라면 애초에 모든 문명들이 그런 성향을 띄었어야 하는 겁니다. 차라리 더 많은 소비와 생산이 진정한 진보라고 말씀을 하시는게 합당합니다. 어떻게 더 많은 소비와 생산이 그 자체로 진정한 진보가 될수 있는지는 이해할수 없지만...

 

4. 이라크가 말씀하신 데로 통합중입니까? 아프가니스탄이 그러고 있다고요? 소말리아가 그런가요?


김기보

 김석영/ 물론 보는 바가 다르겠지만 말이죠. 제가 보기엔 논점을 회피했습니다. 이진경님은 잉여를 두가지 의미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과잉생산되어 쓰지않고 버려지는 것(과잉), 또하나 자본가에게 넘어가 착취되는 것(이윤). 1번을 보시면 조선시대와 산업혁명의 노동시간을 비교하지만 산업혁명이후의 노동시간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더 많아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회피하고 있죠. 인간의 평균수명이 증가한 것은 임상의학과 보건의 개선때문인데 이부분 또한 생산력의 증가로 인해서 생겨날 수 있었고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부의 증가가 없이 임상의학과 공중보건, 국민교육이 가능했을까요? 또한 이윤이라는 부분이 노동자의 노동으로만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도 이미 논파된 사실인데 그 부분을 회피하고 지나갑니다.


강길모

 '산업혁명이후의 노동시간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더 많아졌다는 역사적 사실'이 자본주의 자체의 원리때문에 발생한게 아니라는게 이진경 선생님이 주로 말씀하시는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런 부분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어하려는 여러 노력들의 결과물인거죠. 이것도 명확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원리가 노동시간을 줄여줬고,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늘려준 적은 없어요.

자본주의는 자동으로 모든걸 만들어내는 마법의 도구는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임상의학과 보건의 개선은 굳이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어도 가능한 일이고 - 구 공산주의에서도 기초 과학 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해왔죠 - . 현대 산업 문명 전체, 현대 산업 문명이 나아갈수 있는 가능성들을 자본주의와 완전히 동치시키시는데, 그 부분이 너무 협소한 시각인겁니다. 과학적으로 검증도 안 된 본능을 말씀하시면서요.

어쨌든 그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고 주장하는건 애초 맨 처음 글의 취지를 이해 못하고, 엉뚱한 맥락에서 말하는 것뿐입니다. 추가 댓글을 안 달겠다고 말하고 자꾸 달고 있는데, 글의 맥락과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잣대를 들이대는 부분+ 인간 삶에 대해 지극히 협소한 이해만을 보여주는 부분때문에 답답해서 자꾸 추가 댓글을 답니다.


김기보

 강길모/ 1.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서 노동자도 해외여행을 가는 시대가 열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과잉되어 잉여되었다는 이야기인가요?

 

2. 그 추상화해서 일반화한 개념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요? 아이폰과 베가 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동일강도에서 동일시간 일했는데 이윤은 왜 다릅니까?

 

3. 본능의 의미를 저와 다르게 쓰시는 것 같군요. 초파리 집단이 세대가 지나서 동일한 문화를 형성했다면 그 문화는 초파리의 본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요. 물론 저도 그게 진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좋은거냐면 저도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도은 언제나 비슷비슷 하지요.

 

4. 바그다드와 나이로비과 카불을 가보시면 비슷한 공장과 건물과 상점이 있지요.. 라는 의미입니다.


김기보

 강길모/ 답답한것은 저도 마찬가지지만 서로 토론을 하면서 왜 저런 개념을 사용하는지, 저렇게 생각하는지 알게되면 되겠지요?

 

5. 자본주의의 원리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건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자본가들이 담합하고 경쟁하듯이 노동자들도 담합하고 경쟁합니다. 담합하면 임금이 올라가지요.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임상의학과 보건의 개선은 산업혁명이후의 생산력이 증가된 몫이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결과지요? 그리고 사회주의체제에서도 과학자들을 연구시키려면 생산력이 중요합니다. 그 생산력이 없으면 연구를 할 수가 없지요. 다시 노동시간으로 돌아가서 7시간 30분과 잔업은 그런 생산력을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Goan Young Cheo

 자본주의는 체제의 속성상 노동자사 생산한 잉여가치를 이윤으로 가져가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일을 시킨다는 것이 이진경님의 논점이었군요. 그 근거로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의 노동시간을 들었습니다.원시사회를 살았던 사람들 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더 많은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근거에 대해 김기보님이 반반을 한 것이구요. 김기보님은 현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원시 사회 속의 인간들보다 더 많은 행복과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두 사회의 노동시간과 가치를 비교하려면 그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데 페북 특성상 자세한 설명은 하시지 않은 것 같구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논쟁을 하는가이지요.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행복을 착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복을 증진시켜 주는가에 대해 저도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겠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신 두 분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이찬희

 옛날에는 삼십 분 동안 삼각김밥 세 개만 생산할 수 있다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삼십 분 동안에 삼각김밥 세 개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생산해야만 하는 게 비극 같습니다. 전기료, 집세, 옷값, 학비, 연금, 결혼 비용 등등등. 아이구 머리 아파ㅜㅜ 옛날에는 삼각김밥 세 개만 생산할 수 있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됐는데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