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교육

권정생과 소박한 마을

나무에게-- 2013. 8. 31. 07:42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

요즘 뜨는 키워드는 ‘마을’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마을과 관련된 사업들을 진행하고 기업들도

마을 관련 이미지를 심심찮게 광고에 활용한다. 서점에 가도 관련 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애타게 마을에 매달리는 현상은 공동체라 ‘상상해왔던’ 사회관계의 허약함을 잘 드러낸다.

경쟁에 치여 쓰러져도 손 잡아줄 이 없고 집 앞 엘리베이터만 타도 불안하고, 아이들을 혼자 내보낼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불안의 시대, 그 절박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마을의 관계와 마을에서 가능한 삶을 손쉽게 구성할 방

법은 없다. 그러다 보니 ‘억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마을 만들기’라는 말이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데,

과연 누가 마을을 만들 수 있을까? 마을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일하고 밤늦게 들어와 잠만 자는 수도권 베드타운의 주민들이 어떻게 마을을 이룰 수 있을까? 구도심

과 신도심이 거의 분리된 경기도 신도시에서 마을은 어떻게 가능할까? 마을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잠

시 접어두고 먼저 이런 물음들에 답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작은 공동체를 외치며 마을을 쪼개고 쪼개

어 실제로 있던 관계마저 깨놓고선 마을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건 억지다. 건축도면처럼 마을을 물리적

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풍부한 관계와 밀도, 공생과 환대의 가치를 가진 마을을 뚝딱

만들어낼 방법은 없다.


온갖 자원을 쏟아부어 그럴싸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몇몇 사람들의 눈에 아름다운 마을을

만드는 건 더욱더 위험한 일이다. 그런 마을은 생활의 근거지가 아니라 욕망의 실현지라서 요건에 맞지

않는 사람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더불어 살기 위한 관계보다 혼자 더 잘 살기 위한 방편으로

마을이 이야기된다. 내가 사는 곳에 무엇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는 논리,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위해

마을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마을 담론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런데 나만 안전하면 그곳이 마을일까? 그렇다면 CCTV와 민간 방범회사 장비로 둘러싸인 곳에도 마을

이 있을까? 온갖 잡무를 대신해주는 용역노동자들 없이 며칠도 버티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그들을 투명인

간으로 만드는 아파트도 마을일까?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를 마을이라 부르는 게 옳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마을을 만들었다 자신하는 건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려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시대 마을이 가진 모순은 지방으로 눈을 돌리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마을 만들기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라면, 경남 밀양과 제주 강정에서는 오히려 마을이 몰락하고 있다. “요대로 살다가 죽도

록 해달라”는 절규가 마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마을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


글 제목을 ‘권정생과 소박한 마을’이라 짓고서 언제 선생의 얘기를 꺼낼까 궁금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들은 권정생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응당 하셨을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권정생 선

생만큼 관계와 마을을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권정생 선생의 이야기 어느 작품에나 관계와 마을이 등

장하고 선생만큼 마을과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권정생의 마을은 성공한 사람들이 으스대는 마을이 아니라 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부서져 내려앉

으면서도 함께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에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때로는

자기 것이 부족하다고 아웅대면서도 같이 살아간다.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다. 『몽실 언니』나 『한티재 하늘』에서 묘사되는 마을

은 갈등과 폭력이 사라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현실 속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사는 마을이다. 다만 그 공동체

는 각자의 과잉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고 생명을 지키는 공동체, 지금 이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라고 얘기하는 공동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것, 입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잘못된

향락은 더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것,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푸른 하늘 밑에서 여덟 시간 일하고 이웃과 더불

어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믿음을

따르는 마을이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 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고 마을에 필요한

것은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려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노동과 생활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가치가 소박해지지 않는 이상 마을은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을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귀농이나 귀촌도 마찬가지다. 선생의 말처럼 MBC드라마 <전원일기>에 나

오던 농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농촌은 30년 전까지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고샅길에

거위가 꽥꽥거리며 다니지도 않고 아이를 핥아주는 삽사리(토종개)도 없다. 개는 모두 외국종 송아지만한 도사견

같은 개가 아니면 발바리라고 부르는 작고 앙칼진 개뿐이다. 그것도 모두 목을 매놓고 키운다. 고샅길엔 경운기가

다니고 승용차와 트럭도 다닌다.” 살기 좋다고 알려진 농촌 마을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웃과의 관계

를 불편해하고 자동차를 포기하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농촌 상황이 이럴진대 도시는 어떨까? 선생은 농촌 없이 도시가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제 한미

FTA가 본격화되면 농촌의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선생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근본이며 전부”라고 믿었던 농업

은 더욱더 어려운 환경에 놓일 것이다. 길 떠난 사람을 위해 밥 한 그릇을 남기고 자연의 생명을 위해 고수레와

까치밥을 남기던 전통 역시 그와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믿고 마을을 얘기하는 걸까?


그런 점에서 지금 떠도는 마을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만들어진 환상’에 가깝다. 여전히 우리는 농촌이 사라져도

도시에서 마을이 가능하리라 믿고 많은 프로그램과 돈, 사람만 있으면 마을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심각

한 문제는 이런 환상이 마을의 사라짐에 따른 우리의 결핍감을 거짓되게 채워주고 우리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며

지금의 팍팍한 현실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사는 요지경

세상을 떠받칠 뿐이다.


권정생 선생은 마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한 자각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더불어 지금 우리가 마을을 노래하는 이유에 관한 지속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이런 자각과 성찰 없이 마을의 이

미지만 강요하거나 그 이미지만 팔아먹는 건 공동체의 파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소수의 문화정치만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그곳에서는 관계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돈과 힘으로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곳은 결코 마을일 수 없다.

-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민들레> 85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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