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교육

불안감에 휩싸인 부모

나무에게-- 2013. 5. 20. 21:58

제천간디학교 학부모인 강수돌 교수가 쓴 “불안에 휩싸인 부모” 입니다.

 

1. 현실의 몇 장면들

 

2003년에 내가 <나부터 교육 혁명>이란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많은 학부모나 선생님들을 만나 강의나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조차 현재 학부모거나 예비 학부모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질문이나 고민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강의 도중에는 재미있다고 박수를 치면서도 막상 학부모로서 ‘자기 문제’로 돌아와 생각하면, 오히려 고민거리가 더 많이 생겼다고 했다.

 

학부모 갑: “현재 저희 아이는 (제가 좀 힘들긴 하지만) 공동 육아에서 잘 자라고 있는데요, 이제 곧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하는데, 무지 갈등이 돼요. 초등학교도 공동 육아처럼 대안학교를 가야 할지, 아니면 남들처럼 그냥 일반 초등학교로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만 괜스레 유난떠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학부모 을: “저도 마음은 선생님 말씀처럼 아이들을 자연에서 자유롭게 자라게 놔두고 싶은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요. 애가 막상 시험 점수를 받아 오는 걸 보면, 그냥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거든요. 마구 화가 치솟아 오르기도 하지요.”

 

학부모 병: “다른 애들은 학원이나 과외다, 학습지다, 하고 열심히 다니는데, 우리 애만 이렇게 두다가는 정말 심각하게 뒤처지지나 않을까, 내심 불안한 걸요. 애들 아빠가 회사 생활을 힘들게 하는 걸보면 애들만큼은 좀 잘 해서 아빠처럼 힘들게 살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구….”

 

학부모 정: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데, 선생님 말씀처럼 그렇게 느긋하게 애들을 키우면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나중에 애들이 ‘왜 엄마아빠는 나를 마구잡이로 내버려 두어 내 인생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었어요?’라며 원망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해요.”

 

학부모 무: “애들 아빠가 이런 강의를 들어야 하는 건데… 참, 아쉽군요. 집에서 애들 교육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도저히 말이 안 통하거든요. 옆집 아줌마도 무섭지만 애들 아빠가 더 무서워요.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벌어다 주니,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한다.’며 저를 야단치거든요.”

 

학부모 기: “아, 글쎄, 고등학교 다니는 우리 아이가 도리어 저보고 ‘아이고, 우리 엄마는 정말 천진난만하셔.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19세기 같은 이야기만 하는 거야?’라 하는 거예요. 제가 시험 점수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좋아하는 것 하면서 영화도 보고 전시회나 공연 같은 것도 많이 보는 게 좋다고 이야기하면 글쎄 순진하다고 하지 뭐예요?”

 

2. 불안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 모든 학부모들의 공통점은 ‘불안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전염된다. 이웃과 온 사회를 전염시킨다. 다른 말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뚜렷한 줏대나 소신 없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이를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데, 정작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이 제대로 구현될지 잘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확신이 안 선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과연 ‘확신’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내가 무슨 행위를 해서 성공적인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면 확신이 생긴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을 다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결과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을 것으로 판단된다면 확신이 생기기 어렵다. 그렇다면, 보통의 사람들이 큰 의심 없이 다른 말로 확신을 갖고 자신 있게 가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유난 떨지’ 말고 다 남들 하듯이 하는 것, 또 우리 사회에서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보여준 모델을 따라 하는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것은 혹시 결과가 나빠도 나 혼자만 그런 건 아니니 별로 억울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고, 성공한 사람들을 모델 삼아 본받고자 노력하는 것은 나도 그렇게 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불안감의 뿌리도 우선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앞에 말한 확신의 근거라고 하는 면에서 첫째, 남들이 다 가지 않는 ‘독특한’ 길을 가려는 데서 오는 것, 둘째, 통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아 ‘불확실한’ 길을 가려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들이 다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얼핏 나 혼자만 유난을 떠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보다 자세히 보면 모두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다 다른 것도 아니지만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이런 사람들도 많고 저런 사람들도 많다. 대다수가 간다고 하는 것도 상대적 다수에 불과하며, 극소수가 하는 일이란 것도 상대적 소수라는 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절실하다고 느끼는 길, 정말 가고 싶다고 느끼는 길을 찾고 꾸준히 걷는 일이다. 남들이 간다고 나도 덩달아 가는 것은 겉보기에는 ‘안심’이 되지만 속으로는 늘 (가장 중요한) ‘2% 부족’, 즉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다음으로, 통상적으로 성공한 모델을 추종하는 일의 본질은 무엇일까? 아이들을 사랑한답시고 어른의 경험 중 성공적 결과 모델만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방법론이 치명적이다. 우선, 통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함에도, 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호되게 시키기만 하면 우리 아이도 그렇게 될 것이라 ‘착각’한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학원이나 과외 기회를 아이들에게 제공해도 모든 아이들이 ‘SKY 대학’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과연 일류대학, 일류직장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한 진리 탐구나 자아실현 및 사회 공헌과는 무관하게 돈이나 권력, 명예와 위신 같은 기득권을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또한, 어른들 관점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을 추출한 뒤 이를 한창 자라는 아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따르라는 식은 아이들에게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랑이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변형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 학부모들이 개별적 차원에서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는지와 관련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질문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경쟁 지상주의’를 핵으로 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 개인의 줏대와 소신, 철학이 확고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지만, 왜 마음으로는 좋은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 선택은 엉뚱하게 흘러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시스템과의 관계라는 차원이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 우리 삶을 규정하는 시스템이란 한마디로 ‘경쟁 사회’다. 독일 말에 ‘팔꿈치 사회’라는 말이 있는데,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지 않으면 내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는 말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다.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년)에도 경제대공황 기에 일자리 하나를 놓고도 수천 명이 몰려들어 서로 경쟁하는 팔꿈치 사회의 모습이 날카롭게 풍자되고 있다. 불행히도, 70년 전 영화가 나온 시점에 비해 대망의 21세기라고 하는 현재 시점에도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갈수록 더하다. 우리 부모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우리보다 아이들 세대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러니 살벌한 생존 경쟁에 대비하도록 아이들을 철저히 준비시키는 길이 현명한 교육이 아닐까, 하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런 길을 가지 않거나 다른 철학을 갖는 것은 이미 ‘인생 실패’를 결정해놓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바로 여기서 몇 가지 짚을 점이 있다. 첫째로, 치열한 경쟁 사회라고 하는 시스템조차 영원한 자연 법칙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란 점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역시 수억 년 인간의 역사 중 불과 500년 내외의 특수한 현상이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경쟁 사회를 만들고 조장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득권 세력이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가 탄생하는 데는 이미 봉건주의 사회를 깨면서 급부상한 자산가들, 상공인 계급들이 단결하고 혁명을 일으킨 과정이 있었다. 그 이후 수백 년 간 기득권의 아성을 확고히 쌓으면서 경쟁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하고 유포해왔다. 셋째로,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경쟁 이데올로기를 중간층이나 기층 민중이 스스로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경쟁질서가 만들고 강화하는 ‘사다리 질서’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질서를 인정한 위에서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 하는 기득권 경쟁의 덫에 빠져버린 것이다. 일부 성공한 ‘강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적 과정도 숨어 있다. 그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 위신과 외양에 좌절한 결과 선망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기득권층은 기득권에 중독되어 변하지 못하고 비 기득권층은 기득권을 동경하고 강박적으로 집착하기에 변하지 못한다. 이 모든 현상은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병들어 감을 암시한다. 경쟁에서의 승자조차, 일시적으로나 겉보기에는 폼 나는 승리에 도취될지 모르나 진정한 내면의 평화나 행복의 관점에서는 결코 ‘인생 성공’이 아닐 수 있다. 남들을 다 누르고 자신이 최종 승자가 되려는 과정에서 남들을 울리고 자신을 억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정도는 심해진다. 그러니 경쟁의 성공 또는 성공에의 집착은 승자나 패자 모두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한다. 개인도 변해야 하지만 시스템도 같이 변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변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3. 불안을 이기는 법

 

이제 학부모들의 불안 뒤에는 어떤 뿌리가 있는지 알았으니, 그 해결책도 의외로 명확하다. 물론 말이 쉽지 실천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문제 인식을 근본적으로 하는 이가 늘수록, 또 소신을 갖고 꾸준히 실천하는 이가 늘수록,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 소통과 연대를 많이 할수록 우리 미래는 밝아질 것이고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첫째, 학부모 갑처럼 대안적 길을 가는 것을 “괜스레 유난 떠는 것” 같다고 볼 필요가 없다. 아이나 학부모를, 그리고 온 사회를 병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는 현재의 흐름에 제동을 거는 일, 그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일은 오히려 더불어 권장해야 할 일이지 유별난 일탈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의 병적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쳐나간다는 사명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명감으로만 뭉치면 힘들다. 오히려 내가 편하고 아이가 편해서 우리가 행복한 선택을 하는 것이란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나 혼자만 하면 불안하지만, 더불어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하고 토론하고, 같이 실천하면 불안감이 아니라 기쁨이 커진다. 생태유아교육운동, 참교육운동, 동화읽는어른모임, 어린이책시민연대, 어린이도서관연대, 참교육학부모연대, 평등교육학부모연대, 대안교육연대, 대안교육학부모연대, 학벌없는사회 등 풀뿌리 모임들이 무수히 생성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둘째, 학부모 을이나 병처럼 “막상 시험 점수를 보면” 모든 게 확 뒤집어지고 “아빠처럼 힘들게 살지 않게 하려면 그냥 두면 안 된다”는 입장에 대해선, 시험이나 점수를 ‘초월’해 다른 기준으로 대응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어른들 마음속에 ‘상처 입은 자아’가 숨어있다는 것도 보아야 한다. 아이가 원하면 대안학교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고, 일반학교로 가더라도 점수에 초연해서 아이 내면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만약 시험 점수나 등수 때문에 꾸지람을 먹은 아이가 자살을 했다고 치자. 과연 그 부모는 죽은 아이를 안고 무엇이라 울부짖을까? “성적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 제발 우리와 함께 살아만 다오.”라고 하지 않을까?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점수나 등수에 목을 매지만, 정작 아이가 목을 매고 나면 점수나 등수가 ‘필요 없다’고 한다. 때가 늦었지만, 이것이 우리 본심이다. 아이들이 잘 먹고 잘 자라는 것,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부모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아이의 성적보다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걸 찾아 성실히 정진하는 것, 자기 좋은 일을 하면서도 사회적으로도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것, 바로 이런 것이 행복의 지름길 아닌가? 이런 길을 가려면 시험 점수나 상대 비교 같은 것을 ‘초월’하여 아이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의 내적 성장과 성숙(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기쁨)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면 된다. 아이가 즐겁고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때가 되면 나중에 자신의 소질과 끼를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 대안학교의 대명사인 ‘서머힐 스쿨’의 A. S. 닐 교장의 확신이다.

 

셋째, 학부모 정이나 기처럼 “아이의 원망”이 두렵다거나 “아이가 오히려 나를 순진하다고 비웃는” 경우, 해결책의 핵심은 ‘인생의 자기책임성’ 개념이다. 부모라고 아이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오히려 해롭다. 부모는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오로지 사랑으로 돌보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보호자, 조언자, 후원자, 격려자). 아이들이 어릴수록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베풀어야 하며,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조금씩 정을 떼면서 독립을 준비하게끔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인생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율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부모는 곁에서 따뜻하게 조언과 후원만 하면 된다. 혹시라도 아이가 더욱 경쟁 마인드로 부모를 가르치려 드는 경우, 부모는 “경쟁 사회가 현실이긴 하지만 그 현실이 옳지 못하고 병든 것이기 때문에 정말 올바른 길, 정말 행복한 길을 가자는 것”이라고 차분하게 설득하면 아이도 이런 관점을 마음으로 반길 것이다. 때로는 ‘옆집 아줌마’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도, 심지어 선생님마저 치열한 경쟁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채, 오로지 점수 기계, 시험 기계만을 만들고자 한다. 한편, 학부모 무의 경우, 배우자가 문제다. 많은 경우, 안타깝게도 아내는 남편만 바뀌면 좋겠다고 하고, 남편은 아내만 바뀌면 된다고 한다. 물론 둘 다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나부터’ 줏대를 바로 세우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끼리 소통과 연대를 강화하고 토론과 대화를 확장하면서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난공불락의 아성으로 보이던 ‘경쟁 사회’ 시스템조차 위기에 빠질 것이고 작지만 아름다운 대안적 실천들이 서서히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돈과 권력,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시스템보다는, 내면의 평화와 행복, 나눔과 보살핌을 중시하는 시스템이 건강하고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이나 취업에는 재수나 삼수, 심지어 칠전팔기도 되지만, 인생에는 재수도 불가하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후회 없는 선택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내심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 아이들을 ‘경쟁 사회’에 적응하기만을 계속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매 순간 인생의 아기자기한 과정에 주목하면서 어른과 아이 모두 ‘행복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참할 것인가?

 

[출처] 강수돌 - 불안감에 휩싸인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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