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변방의 사색 - 시골교사 이계삼의 교실과 세상이야기

나무에게-- 2013. 7. 25. 22:21
 

 

이계삼

 

이분을 정말 잘 표현해 놓은 좋은 글이다.

 

교육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계삼의 글을 읽기를 권한다.

 

불편하고 미안 하지만 말이다..

 

 

변방의 사색 - 시골교사 이계삼의 교실과 세상이야기
이계삼 지음 / 꾸리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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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이계삼을 일컬어 잠수함의 토끼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이 사람의 예민한 촉수가 세상만사에 닿아 있는 게 너무나 놀라웠다. 고뇌하는 교사였다가, 지금은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 사람은 세상 모든 일을 ‘고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냥 ‘사색’을 하는 게 아니라 ‘고뇌’하는 게 보인다.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인다. 어린 날, 넘어져서 까진 무르팍, 살껍질 벗겨진 채로 날바람을 맞을 때의 쓰라림을 기억한다. 이 사람의 촉수는 그냥 더듬더듬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맞이한다. ‘소위 밀양 사건’의 가해자 중 하나인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답지 않게 문장이 허방지방하는데, 아이에 대해서 보듬다가 야단치다가 안타까워하다가 허탈해 하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꼭 아이 부모 같은 자세다. 제자의 잘못, 세상의 비난에 그를 감싸지도 돌이키지도 못해 하는 그는 절대 쿨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제는 많은 ‘교사’들이 자기 학생들이 겪는 고통이나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얼마나 ‘이성적으로’ 대하는가. 가슴으로 화내고 아파하고 해결하려 애쓰는 교사들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 세상에 이 사람은 너무 예민하다.

 

그리고 그 많은 사안들. 우리가 살아가려면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건 즐기고 누릴 것들에 대한 포기도 포함하지만 아파하고 고민해야 할 것에 대해서도 선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크기, 머리의 크기, 발의 크기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신문에서 쏟아지는 그 많은 이슈들에 다 분노하다가는 마음이 지쳐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당한 일들에 대해 욕을 하고는 돌아서서 잊어버린다. 사람들이 너무 빨리 잊는다고 욕하지만 사람들이 다 마음에 담고 고민하기에 너무 많은 기막힌 일들이 일어나는 게 맞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 몸의 크기는 다를 바 없으나 마음이 자꾸 작아지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고, 이계삼 같은 이는 인간이 본래 가져야 할 마음의 크기를 아직도 안고 있어 이 세상 짐을 다 짊어져야 하는 건지도 ....

 

윤동주의 순수가 오히려 저항이 되었다고, 나도 국어시간에 가르치곤 했지만 실감을 하지 못했었다. 예민하고 순수한 것이 힘이 되는가? 너무 맑아서 강하다고 나도 힘주어 말했지만 윤동주는 내게 너무 먼 별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변방의 사색을 읽으면서 윤동주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무릎을 쳤다. 이계삼이 날카로운 글을 쓰니까 무슨 ‘논객’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글을 많이 읽어 보지 않고 이 나이도 젊은 사람을 무슨 일종의 문화권력처럼(어쨌거나 고민깨나 한다는 교사들 사이에서 그는 명망가이니까) 여기면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수줍고 맑은 사람이다. 아니,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를 모른다. 연수 때 먼 발치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때 받은 인상은 글과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성과 감성을 문필에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화려한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아픔 때문에 사람들 마음을 울려 이름을 얻은 사람이다.

 

이계삼은 불편하다.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계삼의 글을 읽으면 '동지를 만났구나'라고 마음이 흐믓해지는 게 아니라, '어쩌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심각하구나, 그리고 저토록 처절하게 고민하는 그에 비해 나의 고민은 참으로 얕구나...'하는 반성이 든다. 그의 글은 온통 이 땅의 교육(특히 학교교육)은 이제 더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아마도 '사망선고'까지는 아니겠으나 절망의 상처를 대충 덮고 어설픈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망이라고, 차라리 이만큼이나 잘못되었고 이만큼이나 비참하다고 다 까발리고 인정하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고 그는 외친다.

 

마치 경주마가 안대를 하고 달리듯이 좁은 눈으로 내가 있는 학교 내가 아이들을 만나는 교실만을 보고 그래도 학교는 따뜻한 곳이고 교사 한 사람 한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희망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나는 참으로 부끄럽다. 그렇다고 내가 말하는 희망을 놓을 수도 없다. 내가 수십 년 동안 믿어오고 기대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로 인해 보아야 하는데, 그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당신은 너무 비관적이라고 외치고 싶은데, 그러기에 그의 논리는 너무나 정연하고 그의 고민은 너무나 진실되기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다. 마치 공부도 잘하는 아이가 인간성마저 좋으면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 미워할 수도 없는데 미운 것 같은 마음이랄까. 장발장 앞에 영혼의 무릎을 꿇은 자베르의 심정이 이와 조금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자베르가 아니다. 나는 교육에 대해 잘못된 신념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옳은 방향의 고민을 하던 사람이었다. 아픔을 느끼는 정도에 있어 이계삼만큼 깊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그가 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차례다. 내가 몰랐던 것은 무엇이고 그가 과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하여 함께 이 교육불가능을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해 모색할 차례다. 아니, 누가 그랬던가, 모색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하라고. 그는 이미 하고 있는 '행동', 나는 망설이고 있는 그 '행동', 양상은 다양할지라도 이제 그 '행동'을 할 때이다.

 

출처 : http://blog.aladin.co.kr/nuribyul/6166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