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빌토튼 - 사람을 위한 경제, 자립적 생활을 위하여

나무에게-- 2013. 11. 9. 20:58

녹색평론 132호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 발간된《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에 실린 글이기도 하다.

꼭 읽어 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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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경제, 자립적 생활을 위하여

빌 토튼

 

빌 토튼 선생은 정력적인 집필활동으로 알려진 평론가이지만, IT 관계 회사 ‘어시스트’(사원 800명)의 사장이기도 하다. 저서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최근에는 스스로 농사일에 열심이며 사원들에게도 권유하고 있다. 경제학 박사로 IT 기업의 사장님이 어째서 농사일을?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우리 대학생 네 명이 취재에 나섰다. 본사는 도쿄에 있지만 자택은 교토 북쪽 가모가와(賀茂川) 강변의 조용한 주택가이다. 주위에는 크고 훌륭한 저택들뿐이다. 처음 안내된 곳은 자택의 뜰이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100평 정도의 넓은 뜰은 전부 밭이었다. 가지, 아욱, 파, 우엉과 같은 채소 이외에 포도, 키위 등등. 군데군데 탱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빗물을 받아 밭이나 작업에 사용한다고 했다. 뜰로 가는 통로에는 큰 통이 몇개 줄지어 있었고, 그 속에는 모두 말똥, 소똥, 닭똥 등 유기비료가 들어있었다. 놀라운 것은 변소였다. 토튼 선생의 변소는 이른바 이동식 화장실. 인분도 비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말똥은 자택에서 4km 떨어진 마구간에서 손수 리어카로 운반해 온다고 한다. 사원 800명을 보유한 회사의 사장이 말똥을 리어카에 실어서 운반한다?!

사장님이 사는 큰 자택이라고 듣고, 우리는 그냥 모든 게 자동으로 움직이는 호화로운 저택을 상상했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자동차는 타지 않고, 밭일을 하며 인분이나 말똥, 빗물 탱크 등, 전근대적이라 할까, 마치 에도(江戶)시대의 농민 같은 생활이었다. 일본에 귀화한 미국인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 내용은 매우 자극적이고 흥미로워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되었다.(福森正彦, 村上佳世, 小山田貴幸, 佐藤安希子)


― 어떻게 해서 뜰을 밭으로 만드셨습니까?

전에는 이 뜰이 테니스 연습장이었습니다. 매일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지요. 그런데 테니스를 한 뒤에 남는 것은 자만(自慢) 아니면 불만뿐이었죠.(웃음) 안되겠다 싶어서 전부 밭으로 조성했습니다. 이 밭에서 나와 우리 가족이 한 해 동안 먹는 채소가 나옵니다. 맛도 좋고 농약도 없으니까 안심이죠. 땀을 흘리니 건강에 좋고, 게다가 즐겁습니다. 좋은 것뿐입니다.(웃음)

― 주차장도 대부분 농사용 도구나 물건을 두는 장소가 되었군요.

자동차는 없이 지냅니다. 대개 걸어다니죠. 그러니 차고도 필요 없지요. 재작년까지 우리집 차고는 어떤 젊은이가 경영하는 유기 야채 가게로 빌려주었습니다. 지금은 규모가 커져서 맞은편 상점가로 옮겨 점포를 내었지만요.

― 걷는 게 좋습니까?

아주 좋지요. 날씨가 서늘해지면 교토역까지 걷습니다.

― 교토역까지요? 그렇게 멀리?

그래요. 6~7km 정도죠. 이 거리는 속칭 ‘사장님 거리’라고 합니다. 누구나 아는 큰 회사들의 사장 집들이 쭉 늘어서 있지요. 나는 매일 이 거리를 산보합니다. 하지만 이 거리에 살고 있는 사장님 누구와도 마주치는 일은 없어요.

― 왜 그렇죠?

그분들은 모두 검은색 자동차를 타고 다니니까요.(웃음) 나는 그런 생활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걸어 다닙니다. 물건을 살 때도 전부 근처 가게에서 삽니다. 그래서 이 근처 사람들은 전부 친구죠.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뿐입니다.

― 토튼 선생님은 일본에 귀화하셨지요?

2006년 8월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쭉 영주권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살게 된 지 40년이 지났군요. 바로 내일, 8월 26일이군요. 40년 전 1969년 8월 26일에 처음 일본에 왔었죠.

― 어째서 일본 국적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셨나요?

둘째딸이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우리 부부도 차례로 카우아이, 마우이 섬을 돌았는데, 그때마다 비행장에서 별도의 게이트로 연행되어 철저한 심문을 당했습니다. 테러리스트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죠. 내가 테러리스트?!(웃음) 농담이라도 너무 심한 거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쓴 책에서 미국을 꽤 많이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나라인 미국이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국민을 테러리스트 취급을 한다? 어디가 민주주의란 말인가…? 나는 미국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국제협정을 어기고 수많은 일본 국민을 죽였습니다. 나가사키, 히로시마, 도쿄 대공습…. 어째서 죽였느냐 하면, 일본 국민이 승인한 정부가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전쟁의 책임자인 국민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베트남·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도 미국 시민인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전쟁 따위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적을 버린 것입니다. 비행장에서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자 더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죠. 두 번 다시 미국 땅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 처음에 어떤 이유로 일본에 오셨던가요?

일하고 있던 회사로부터 시장조사를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특별히 희망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대학원에서 경제를 전공했는데, 그때 교수에게서 공자의 《논어》를 소개받고 읽었어요. 몹시 감명을 받았습니다. 공자의 학문은 왕이나 지배자를 향한 것입니다. “당신은 천운(天運)으로 왕의 지위를 얻었다. 하늘로부터 부여된 지위이다. 따라서 그 운명에 감사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고, 사회와 백성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에 와서 실제로 그러한 경영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전쟁 전까지 이러한 유교를 축으로 하는 도덕교육을 하고 있었고, 전후 고도 경제성장기의 위대한 경영자들은 모두 이 유교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 다테이시 카즈마(), 이데미츠 사조(出光佐三), 혼다 소우이치로() 등등. 유교적 경영으로 일본은 성공했고, 큰 경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미국과 일본은 비즈니스를 하는 방식이 다른가요?

다르죠. 미국은 해적 국가입니다.(웃음)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죠. ‘토튼’은 노르웨이 이름입니다. 노르웨이는 바이킹의 나라죠. 그 해적이 프랑스를 침략해 만든 것이 노르망디. 그리고 영국,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해적의 피가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웃음)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죠. 비즈니스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가진 것을 정복하여 매수해버립니다. 이것이 미국의 기본적인 비즈니스 방식입니다.

―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그러면 일본의 비즈니스는 어떻습니까?

일본은 ‘서로 돕는’ 나라입니다. 태풍이 오면 모두가 협력해서 마을을 지킵니다. 농업용 수로(水路)도 모두 함께 만듭니다. 초가지붕을 다시 입히는 일도 마을사람 모두의 협동으로 했습니다. 비즈니스도 그러했습니다. 내가 경영하는 회사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원들이 고객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 고객도 기뻐하고, 고객이 늘어납니다. 그 결과 회사의 수익이 오르고 급료도 올라갑니다. 때문에 고객에게 정성을 다합니다. 사원들은 주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고객에게 정성을 기울입니다. 일본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 시절부터 “화(和)를 소중히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가장 다른 점이지요.

― 그렇지만 토튼 선생님은 일본에서 40년이나 비즈니스를 해오셨는데, 그런 일본의 좋은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셨나요?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요. 일본은 쇼와(昭和) 20년, 전쟁이 끝난 이후는 그러한 도덕교육을 그만두었습니다. 쇼토쿠태자의 정신은 패전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 패전으로 사라졌다는 말씀은 어떤 뜻인가요?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는 관계, 즉 경제적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쁜 말로 하면, 노예화되었지요. 자유로운 인간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판단을 가르칩니다. 자유로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노예한테는 자유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덕도 필요 없지요. 그저 강자의 말을 듣도록 교육하면 됩니다. 전쟁 전까지 아이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좋은 자식이 되려면 어머니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했습니다 ― 이빨을 닦아라, 숙제를 해라, 자거라, 일어나거라. 이빨을 왜 닦나, 왜 숙제를 해야 하나, 1 더하기 1은 어째서 2가 되나? 그런 의문을 품는 자식은 나쁜 자식, 불량한 아이가 됩니다. 의문을 갖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교육, 암기교육…. 교육‘마마’(敎育ママ)는 전후(戰後)에 생겨난 것입니다. 즉, 미국은 일본이 도덕교육을 그만두고, 강자한테 순종하면서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는 인재를 기르기 위한 교육을 하도록 장려한 것입니다.

― 그렇게 해서 미국에 무슨 득이 있었나요?

전후 일본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무역 상대는 아무리 봐도 중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비에트와 미국 사이에 냉전구조가 시작되어, 미국은 일본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장을 차차 일본에 개방했지요. 그렇게 해서 일본은 미국으로 수출하는 데에 중독이 되고 말았죠. 지금도 그것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 나라에 자동차를 수출할 필요가 있을까요? 경제학적으로 봐도 틀린 얘기죠. 여러분은 사사키(佐佐木) 리포트(1983년), 마에카와(前川) 리포트(1986년)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 모릅니다. 가르쳐주십시오.

고이즈미 내각의 규제완화, 민영화, 빅뱅 같은 정책의 청사진이 되었던, 일본은행 총재들이 작성한 유명한 리포트입니다. 그 내용은 미국정부의 요망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죠. 거의 직역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이 나라는 전후 65년이 지났지만 아직 점령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 하지만 미국 덕분에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어떻게 해서 미국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요?

아니,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본은 독립국이라는 것입니다. 독립국은 다른 나라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독일이 어떤 나라를 따르고 있는가요? 프랑스는 어떤 나라를 따르고? 중국은 어떻습니까? 어떤 나라도 추종하지 않습니다. 그게 독립국입니다. 노예로 사는 것이 즐겁다면 노예의 길을 택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고 싶다고 말해서는 안되죠.(웃음) 여러분은 부모님한테서 독립했나요?

― 아니요. 아직 못했습니다. 부모님께 빌붙어 살고 있습니다.(웃음)

그렇다면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지요. 여러분이 독립을 한 뒤에도 양친이 자기 편한 대로 이래라저래라 명령한다면 싫겠죠?

― 독립이라는 의미로 말한다면, 에도시대의 일본은 독립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일본은 에도시대에 완전한 독립국이었죠. 쇄국정책이었기 때문에 이 섬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우수한 순환형 사회를 구축해놓고 있었지요. 외국의 요구에도 굴함이 없었어요. 그리고 화(和)의 정신으로 260년 동안이나 평화를 지켜왔습니다. 그러한 나라는 좀처럼 없습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이후 불과 10여 년 만에 중국,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만주를 침공하고, 세계대전에서는 열강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패전 후에는 쭉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해왔지요.

― 하지만 저희는 일본이 쇄국을 했기 때문에 세계에서 뒤처져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쇄국이 좋은가 어떤가는 별개 문제로 하고, 당시에는 쇄국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런 여지가 없습니다. 먹을거리는 칼로리 기준으로 60%를 수입하고, 곡물은 70%, 에너지는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젊은 학생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음,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불안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태어난 이후 쭉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서 별로 의문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세계 전역으로부터 온 식품이 슈퍼마켓에 널려있으니까요.

의문을 갖지 않도록 하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렇지요.(웃음) 미국은 마인드컨트롤을 능란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쌀을 먹고 있던 일본인을 빵에 익숙하게 만들어 일본에 빵을 식사용으로 정착시켰습니다. 밀은 거의 미국에서 수입합니다. 영화, 음악, 책, 텔레비전 등, 미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가를 계속해서 선전해서, 일본인에게 미국이라면 꿈의 나라, 동경의 나라가 되었지요. 패션이나 음악도 미국 복제품이죠. 전부 마인드컨트롤. 식사도 서양풍이 되고, 일본의 도덕은 잊혀졌습니다. 돈벌이는 좋은 것, 소비하는 것도 좋은 것, 사치는 더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미국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경제까지 미국식으로 되었습니다. 쇼와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옛 도덕교육을 받은 경영자들이 현역이었지만, 그들이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난 헤이세이(平成) 원년부터 일본은 미국식 경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경제성장은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되었죠.

― 미국식 경영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지요?

기업은 인간의 행복과 건강에 기여하는 것만을 만든다, 이것이 경제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에서도 회사의 이익추구 때문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심지어 건강을 해치는 식품까지 태연히 팔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도 새로운 것을 사지 않으면 안되고, 패션, 브랜드 제품, 게임, 새 자동차, 건강보조식품, 다이어트약 등등. 광고선전은 전부 마인드컨트롤입니다. 미국식 경영이라는 것은 소비자를 기업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 정말 저희들은 휴대전화 없이는 생활할 수 없습니다. 여성들도 밤낮 패션에 열중해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기업의 실적이 늘고, 세상이 밝아진다면 좋은 것 아닌가요?

정말로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합니까? 아까 사사키 리포트 얘기를 했지만, 사사키 리포트(1983년) 이전에는 일본 경제는 연간 10~15%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 이후는 5%로 떨어져, 지금은 퇴행하고 있습니다.

― 그런 정도인가요.

범죄도 19% 증가하고, 자살률은 35% 증가했지요. 헤이세이 원년 이후는 50%나 증가해서, 암을 제외하면 30~40대 남성의 사인(死因)으로 자살이 제일 많습니다.

― 제일 많다고요?

그 사이에 실업률은 50~60% 증가했습니다. 생활보호 세대는 13%나 증가하고, 소득격차는 10% 이상 벌어졌습니다. 이래도 세상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소위 승자그룹과 패자그룹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그렇습니다. ‘서로 돕는다’는 생각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화(和)를 소중히 한다는 일본인의 미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 이것도 전후의 노예교육 효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예전에 여러분의 할아버지 시대까지는 의식주에 관한 일은 대부분 스스로 했습니다. 집도 스스로 고치고, 목수일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옷을 짓고, 채소도 스스로 길렀습니다. 지금은 돈을 벌어서 거의 모든 것을 딴 데서 사서 씁니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여 구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까지 돈을 주고 삽니다. 스스로 고칠 수 없으니 대부분 쓰고 버립니다. 혹은 돈을 많이 주고 수리를 합니다. 그러한 기업의 영리목적, 즉 마인드컨트롤이 지구의 이와 같은 위기상황을 만들어낸 것이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말씀을 들으니 틀림없이 그렇군요. 용돈은 바로 사라지거든요.(웃음)

나는 전동 기구는 가급적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고칠 수 없으니까. 자전거도 기어가 붙어있지 않은 구식입니다. 언제라도 마실 물을 담은 수통을 지니고 다닙니다. 페트병은 사지 않습니다. 재생 가능하지 않은 것은 사지도 않고요. 나 자신이 고칠 수 없는 것은 사지 않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마인드컨트롤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나는 소비의 노예가 아니라 독립된 인간으로 살고 싶습니다.

― 아, 그렇군요.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마련하려고 밭일을 하시는군요.

그래도 아직 멀었습니다.(웃음)

― 멀었다니요?(웃음)

일본의 현재 GDP는 약 500조 엔이지만, 300조 엔 이하까지 내려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그렇게나요? 어떻게 해서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글로벌경제의 파탄. 글로벌경제라고 하지만 실태는 카지노경제, 즉 주식의 매매나 외국환거래로 돈을 버는, 도박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2007년 외국통화의 거래액은 하루에 452조 엔이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세계의 무역액의 86배입니다. 세계의 GDP 합계의 27배이기도 하지요.

― 일본에서도 그렇습니까?

그렇지요. 일본의 외국환거래액은 연간 1만 3,140조 엔. 무역액의 84배. 일본의 실질 GDP의 25배입니다. 이것은 모두 실체경제와는 관계없는 순수한 도박입니다. 이미 리먼브라더스 도산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런 경제시스템은 틀림없이 파탄합니다.

― 그렇게 카지노경제가 과열되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가장 큰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석유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피크오일은 지났습니다. 화석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에 반드시 고갈됩니다. 수소도 마이너스 에너지입니다. 원자력은 위험합니다. 석유처럼 싸고 풍부한 에너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석유가 고갈되면 경제는 대폭락합니다.

― 석유가 없어진 세상이 어떨지 상상이 안됩니다. 책을 읽으면 앞으로 40년 후에는 고갈된다고 쓰여있는데, 정말 그럴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10년 후인지도 모르고, 50년 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석유가 없어지지 않는다 해도 세계경제에 큰 제약을 가할 것이 있는데, 환경문제입니다. 10년 이내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석연료의 75%를 줄이지 않으면 지구환경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말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1,000년간이나 계속해서 기온이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경제활동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 경제는 어쩔 수 없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의 매출도 당연히 내려갈 것입니다.

― 그것은 피할 수 없겠네요. 도산도 줄을 잇겠네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연장(延長)으로밖에 앞날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회사는 경제가 폭락했을 때를 대비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구조조정뿐입니다. 내 일은 우리 회사 ‘어시스트’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원들의 행복과 건강을 말입니다. 주주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장인 나는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지요. 급료가 줄더라도 사원들의 행복과 건강이 유지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 급료가 감소되더라도 행복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계획?

나는 금년 10월에 새로운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연봉 6할에 주당 휴일 4일의 생활》입니다.(웃음) 우리 회사 ‘어시스트’는 종신고용입니다. 불경기가 되어도 누구도 해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제가 폭락한다면 급료를 낮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누진으로, 즉 급료가 높은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줄이는 방식이죠. 총액의 4할을 줄이고, 그 대신 일주일에 4일을 쉬는 방식입니다.

― 음, 일주일에 4일을 쉰다면 좋겠지만, 돈이 줄어들면 어쩌죠.(웃음)

경영자의 의무란 뭔가. 그것은 주주를 위해서 이익을 올리는 게 아닙니다. 사원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는 회사나 사원을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사원들에게도 지켜달라고 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소비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브랜드 제품, 해외여행, 전기제품, 패션 등등. 이런 소비를 그만두면 많이 절약할 수 있습니다. 또하나는 의식주에 관한 것을 가급적 자급하는 것입니다. 재봉, 목수일, 텃밭 등등. 그러한 기술을 몸에 붙이는 것입니다.

― 확실히 이론으로서는 납득이 됩니다만, 자신은 없는데요.(웃음)

그러니까 그것을 사원들에게 명령할 수는 없지요. 스스로 솔선해야 되니까. “아버지의 등을 보고 배운다”는 식이어야죠. 그래서 내가 테니스코트를 헐고 밭을 만든 것입니다. 1년 정도 해보고 성공한 뒤에 사원들에게 권했지요. 지금은 50~60명 정도 사원들이 시민농장이나 가정의 텃밭에서 작물을 기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연간 2만 엔의 보조금을 줍니다. 여성은 양재 교실에 다닙니다. 거기에도 보조금을 줍니다. 그래도 스스로 의식주 문제를 처리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주당 4일을 휴무로 하자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급료가 줄어도 자신의 생활과 건강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 아름다운 얘기, 감동적입니다. 토튼 선생님께서 하고 계신 농작업의 의미가 이해됩니다.

아니,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나의 스승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사가아라시야마(嵯峨嵐山)에서 1,000평의 밭을 가꾸고 있는 모리 선생입니다. 이분의 생활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철저하고요. 그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느린 생활(slow life)’ 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분초를 다툴 정도로 분주합니다.” 다음에는 그분을 취재해보시기를 여러분께 권합니다.

― 감사합니다. 꼭 소개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취직활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지, 특히 토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경제가 대폭락한다는 점을 예상해서 저희들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요?

여러분에게 드릴 조언도 우리 회사 사원들에 대한 조언과 같습니다. 일상생활에 쓸모가 있는 일, 즉 의식주에 관한 장인(匠人), 전문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평생을 먹고살 수 있습니다. 샐러리맨은 아니죠.(웃음) 정년이 있으니까. 경제 상황에 따라 목이 잘릴 수도 있어요.(웃음) 평생 먹고사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 회사의 사원들은 샐러리맨이라기보다는 정보 전문가들입니다. 인터넷이나 IT로 막대한 에너지를 씁니다. ‘야후’의 두 개 컴퓨터센터만으로도 세계 전체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전력이 소비됩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는 장래의 정보전달 수단으로서 아마추어 라디오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에너지도 적게 들고 간단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리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에 쓸모가 있습니다. 즉,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직접 쓸모가 있는 기술을 몸에 붙이자는 겁니다.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 생활에 직접 쓸모 있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 예를 들어, 토튼 선생님처럼 텃밭도 가꾸고…. 회사생활을 하시면서 자기 먹을 것을 만드는 기술을 연마한다….

그렇지요. 농민은 훌륭한 기술자입니다. 농민이 되는 것은 무리라 하더라도 텃밭을 시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첫째, 맛이 좋습니다! 그러면 건강에 좋습니다. 더욱 좋은 것은 즐겁다는 것이죠. 나도 자연과 교감하며 바쁘게 지내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

― 오늘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역사나 경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거기서 살아가는 지침 같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김종철 옮김)